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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부석사

사찰소개 자연환경 역사 가람배치 문화재 인물 설화 안내
부석사의 역사
    • 부석사는 신라 때인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부석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외에도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 「부석사안양루중창기(浮石寺安養樓重創記)」, 원융국사탑비, 몇 가지 묵서 등이 있다.
    • 부석사 전경 부석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삼층석탑
    • 창건 직후 의상대사는 40일 동안 법회를 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로써 부석사는 신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서 성장하였다. 의상대사를 다른 이름으로 부석존자(浮石尊者)라 일컫고, 그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였으니 부석사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대사의 제자가 무려 3,000명에 달했다고 하니, 이들이 모두 부석사에서 대사의 강론과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대사의 뒤를 이어 부석사에 주석하여 신라 화엄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로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연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무염(無染)·절중(折中) 등이 있다.

      고려시대 들어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부석사에서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였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전한다. 원융국사는 평생을 부석사에서 지냈고, 입적 후 절에 비가 세워졌다. 이후 1101년(숙종 6)에는 왕의 명령으로 의상대사의 공덕비를 건립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왜적의 침탈로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 천희(千熙)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수하였다.
    •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억압받았으나, 부석사는 큰 변화 없이 법등이 이어졌다. 대대적 중창으로는 1580년에 사명대사의 중건과 1746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전각 등을 1748년에 복원한 일을 들 수 있다. 근대 이후에는 1916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의 전면적 해체 보수가 있었다. 1966년에는 현재 가람의 동쪽 옛 가람터에 있던 쌍탑을 범종각 앞으로 옮겼다. 1977년 이후 일주문·천왕문·승당(僧堂) 등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연표
부석사 연표
연대 내 용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
1053년 원융국사 대장경 인출
1101년 의상대사 공덕비 건립
1201년 조사당 단청
1250년 총명국사(沖明國師) 각응(覺膺)이 아미타경을 조판하여 판전에 소장함
1358년 왜적의 침입으로 무량수전 등 소실
1376년 원응국사 무량수전 등 복원
1555년 안양루 화재 발생
1580년 안양루 중건
1613년 취현암 중건
1723년 안양문 중수
1746년 화재로 인해 전각과 요사 등이 크게 소실
1748년 승당(僧堂),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 범종각(梵鐘閣), 중수
1916년 무량수전, 응향각 보수, 조사당 보수, 취현암 이건
1966년 ~ 동쪽 옛가람터에 있던 쌍탑을 범종각 앞으로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