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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마곡사

사찰소개 자연환경 역사 가람배치 문화재 인물 설화 안내
마곡사의 역사
    • 마곡사의 관련 기록으로는 크게 19세기 지어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과 연대와 필자미상의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禪敎兩宗大本山麻谷寺緣起略抄)』를 들 수 있다.

      마곡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기록의 내용이 다른데,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 후 선덕여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7대 가람 중 세 번째 사찰이며, 창건 이후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의 중수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禪敎兩宗大本山麻谷寺緣起略抄)』에서는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 의해 마곡사가 창건되었고, 그 후 범일(梵日), 도선(道詵)에 의한 확장, 중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 마곡사 전경 마곡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는 창건 이후에 대해 1199년에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왕명에 의해 도적을 물리치고 마곡사를 중수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 12세기 말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에 건립되었던 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 후반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마곡사가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남원과 북원으로 이루어진 마곡사의 기본적인 배치가 이 무렵에 이미 그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5층 석탑은 고려 말에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고려 말기에 마곡사가 번영했음을 보여준다.
    • 마곡사 5층석탑 마곡사 5층석탑
    • 또한『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따르면 마곡사는 조선 전기 세조(世祖)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토록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亡之地]’이라며 감탄하고, 영산전 편액과 잡역의 부담을 면해주는 수패(手牌)를 내렸다는 내용으로 보았을 때, 고려 때만큼의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다른 여타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었다가, 1650년부터 승려 각순(覺淳)에 의한 중창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다. 각순에 의한 중창부터의 내용이 이전의 기록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이며 사실적이다. 각순은 공주 목사로 내려온 이태연(李泰淵)의 시주를 받아 10년 동안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그 후 마곡사는 1782년(정조 6)에 대규모 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소실되었으나, 곧바로 화주(化主) 체규(體奎)를 중심으로 중창이 시작되었다. 특히 1790년(정조 14)에 정순왕후의 발원과 체규의 기도 덕분에 왕실 원자(元子)가 태어났다 전하는데, 이가 곧 순조(純祖)이다. 이때부터 마곡사는 조선왕실의 후원을 입어 지속적인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19~20세도 많은 건물에 대한 중창과 중수가 행해졌다.
연표
마곡사 연표
연대 내 용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함
1199년 불일보조국사가 왕명에 의해 도적을 물리치고 중수함
1650년 각순에 의해 중창, 선당과 약사전 건립함
1682년 영산전 건립함
1782년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소실됨
1785년 대광보전 중창함
1791년 나한전 중창함
1795년 태실로 봉해지고 도내수사찰의 직인까지 받게 되면서 사세 확장함
1844년 흥성루 중수함
1846년 해탈문 중수함
1879년 대웅전 현판 조성함
1910년 해탈문, 천왕문 중수함
1923년 대웅전 중수함
1939년 명부전 창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