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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선암사

사찰소개 자연환경 역사 가람배치 문화재 인물 설화 안내
선암사의 인물
도선국사 (道詵國師, 827∼898)
    • 도선국사 진영 도선국사 진영
    • 통일신라 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이다. 법병은 도선이고, 김씨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 암자격이었던 선암사를 현재 자리에 사찰의 격식을 갖춰 개창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864년, 도선국사의 나이 37세 되던 해, 그는 옥룡사에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 명이라는 점에서 옥룡산문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도선국사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松岳, 개경)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 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에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그 후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로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저술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 (大覺國師 義天, 1055∼1101)
  • 대각국사 진영 대각국사 진영
  •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승려로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아들인 왕자출신 승려이다.

    법명은 의천,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다. 고려 중기 선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 여러 승려들과 교류하였고, 천태학을 깊이 배웠다. 1년 후인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불교전적 정비에도 힘을 썼는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요나라·송나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000 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 등을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의 목록을 편집하였고 이 목록에 따라 간행된 경서가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다.
  •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 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의천은 원래 화엄계통의 승려였으나,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